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산청... 내 인생의 learning 포인트

기사승인 2021.04.07  13:34:50

공유
default_news_ad1

- 찐 인문학 여행 코스 '생각 주머니를 확장시키다'

남사예담촌·기산국악당·유림독립기념관·남면조식유적지·겁외사·목면시배유지

   
산청군 차황면 소재 황매산에서 내려 본 해질녘 산청 산하

지리산 천왕봉을 품고 있는 경남 산청은 청정자연, 힐링, 보양에 더해 인문학 여행 코스로도 제격이다.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지리산이 내어 주는 온갖 희귀약초는 물론이고 곳곳에 산재한 구보급 유물과 문화유산은 ‘찐 인문학 여행코스를 잡기에 더할 나위 없다.

명품 산청의 인문학여행은 만족 이상의 매력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 산청의 면면을 살펴보자.

■남사예담촌

   
남사예담촌 전경

남사마을은 수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던 학문의 고장으로, 공자가 탄생했던 니구산(尼丘山)과 사수(泗水)를 이곳 지명에 비유할 만큼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하다.

2003년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된 ‘남사 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2011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선정된 남사 예담촌은 변화하는 현재 속에서 옛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는 아름다운 마을로 자리 잡고 있다. 한옥 풍경이 어우러진 전통문화 배움터 남사 예담촌에서는 옛것의 풍류와 예절, 그리고 배움이 있는 휴식과 함깨 피어난다.

남사마을은 수많은 선비들이 태어나 공부하면서 많은 이가 과거에 급제하는 등 가문을 빛냈던 학문의 고장으로 공자가 탄생했던 ‘니구산’과 ‘사수’를 이곳 지명에 비유할 만큼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하다. 그 이름의 변용은 사양정사(泗陽精舍), 니사재(尼泗齋), 이동서당(尼東書堂) 등의 서재 명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천왕봉의 줄기인 웅석봉에서 발원해 10여리를 흘러온 ‘사수’의 조화로움이 인상적인 천혜적 자연승지이자 좌청룡 우백호가 다정히 함께하는 ‘쌍용교구’의 모습을 이루는 마을이 바로 산청 ‘남사예담촌’이다.

   
남사예담촌 고택

■둘러볼 만한 산청 곳곳의 문화재

▷남사예담촌 옛담장(국가등록문화재 제281호)

남사예담촌 옛 담장은 2006년도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향촌 마을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씨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8호)

나지막한 돌담 끝에 있는 대문을 열면 그 옛날 화려했을 사랑채와 3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는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집안의 부유함을 말하듯 화려하고 과장된 건축기법이 사용되었지만 그럼에도 아담한 우리네 한옥 특유의 멋이 있다.

▷최씨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7호)

최씨 고가는 1920년에 지은 한옥으로 사대부 집을 모방해 집안의 위세를 과시하는 화려한 모양새에 신경을 썼다. 한옥 특유의 안정적이고 소박한 멋은 없지만 곳곳에 자리한 실용적인 구조로 선조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고가로써 그 명성을 더 하고 있다.

▷니사재(경남문화재자료 제328호)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시 유숙한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한때 박씨 집안의 선조격인 송월당 박호원을 기리며 학문연마의 강학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동서당((경남문화재 자료 제196호)

조국의 독립운동과 파리장서를 통해 우리나라 광복운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업적을 이룬 면우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이 1920년에 설립한 서당이다.

   
사양정사

▷사양정사(경남문화재자료 제453호)

사수천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사양정사는 연일 정(鄭)씨 문중의 재실로써,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단일 건물로는 엄청나게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제개국공신교서(국보 제324호. 2018년 6월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태조가 경무공에게 내린 교서로 최초의 공신교서의 형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서이다.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조선 태조 1년이던 1392년 이성계가 조선 개국 일등공신 이제(李濟)를 개국공신 1등에 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는 이성계의 딸인 경순궁주(慶順宮主)와 결혼한 뒤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을 개국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현재 실물이 공개돼 전하는 유일한 공신교서 원본이며, 조선 개국 초 왕명문서의 첫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교서에는 이제가 다른 신하들과 대의를 세워 조선 창업이라는 공을 세우게 된 과정과 그의 가문, 친인척에 내린 포상 내역 등이 기록돼 있다. 교서 끝 부분에는 발급 일자와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어보(御寶)가 찍혀 있다. 이 어보는 공민왕 즉위 19년이던 1370년 명나라에서 내려준 고려왕의 어보로, 조선 개국 시점까지도 고려 인장을 계속 사용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망추정(望楸亭 경남문화재자료 제632호)

1560년경 초창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재실로 그 동안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1967년 최후의 보수를 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 재실의 구성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밀양박씨 문중의 재실이다.

   
기산국악당 대밭 공연

▷기산국악당

기산 박헌봉선생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나 1934년 진주 음률연구회를 조직하고, 그후 정악견습소, 조선 성악연구회, 조선 가무 연구회에서 다양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1960년 민속악 교육을 위한 최초의 사립국악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이후 한국 국악협회 이사장,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면서 ‘창악대강’을 후세에 남겼다.

산청이 낳은 국악계의 큰 스승인 기산 박헌봉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전통국악 계승발전을 위해 ‘기산관’에서는 선생의 생애와 업적,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고 ‘기념관’에는 국악기 전시 및 소리 체험, 선생의 업적을 영상물로 시청할 수 있다. 교육관과 옥외공연장은 국악강좌, 강습회, 행사 등의 공간으로 마련돼 지난 2013년 9월8일 개관했다.

▷남명기념관(조식유적지)

남명기념관은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 선생이 추구하고자 했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사업을 추진, 지난 2004년 8월 문을 열었다. 기념관 내부에는 남명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이 있으며, 외부 공간에는 신도비, 남명석상, 여재실 등이 있다.

   
산천재와 남명매

▷산천재

은둔의 지사였던 남명의 그 맑은 정신이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속에 지금도 스며 있는 듯...

산천재는 남명조식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했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불렀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었다. 그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를 몹시 사랑했다. 산청 3매 중 하나인 남명매다.

   
겁외사

▷겁외사 - 성철대종사생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바로 옆에 성철스님생가와 겁외사가 있다. 성철스님은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해인사의 초대 방장이자 조계종 제6대 종정을 지냈다.

말년에 주로 합천 가야산의 백련암에서 지냈으며, 1993년 11월, 8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성철스님이 열반한 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는 이후 사람들 사이에 많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 곳 묵곡리는 1912년 음력 2월 19일 성철대종사가 태어난 곳이다. 해인사 성철스님 문도회와 산청군은 1998년 성철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아 단순한 생가복원을 넘어 성철스님기념관을 세웠다. 수행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종교를 뛰어넘는 선 수행, 가르침, 포교의 공간으로 조성, 2001년 3월30일 문을 열었다.

유물전시관에는 성철 스님이 평소 지녔던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비롯해 평소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장 도서와 메모지, 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겁외사는 대웅전과 선방, 누각, 요사채 등이 부속 건물로 있으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김소석 화백이 그린 성철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목면시배유지를 찾은 단체관광객

▷목면시배유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위치한 목면시배유지는 고려말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棉花)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원나라에 가는 사신의 일원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붓대에 면화씨를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잘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명주, 모시, 삼베 등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고생을 했지만 목면의 전래로 우리나라 의복 역사상 일대 혁명을 가져왔고 서민생활에도 크게 기여했다.

목면시배지(木棉始培地) 주변에는 지금도 조상의 얼을 되새기기 위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목면시배유지는 고려말 공민왕 때 '의류혁명'을 일으켰던 문익점 선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으로, 지금은 목화밭과 전시관, 나라에서 문익점 선생에게 하사한 부민관 등을 볼 수 있다.

서진수 기자 gosu420@naver.com

<저작권자 © 트레블레저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